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생전 화가로서의 실패 === 살아있을 당시 고흐는 화가로서 실패했다. 생전 단 한 작품만이 판매됐는데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400프랑에 구입했다. 평론가가 전시회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고 평론한 글이 하나 남아있다. "반 고흐는 색의 명암이나 색조의 정확성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붓을 격렬하게 놀려서 거대한 풍경을 그렸다. 양탄자를 향해 얼룩덜룩한 책 더미가 놓여있다. 연구에는 괜찮을 법한 모티프이지만 회화의 소재로는 적합치 않다.(귀스타브 칸, 1888년)" 그런데 밑에 재평가를 보면 알겠지만 사후에 생각보다 빨리 인정받았다. 사후 15년 쯤 후엔 거장으로 여겨졌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고물상에게 그림을 팔았는데 고물상이 물감을 긁어내고 중고 캔버스로 팔았다는 이야기, 파리의 카페 뒤 탕부랭에서 경매로 그림을 팔 때 그림 10장 가격이 50상팀(커피 두 잔 가격)이었다는 이야기, 뉘마 크로앵 영감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을 수 없자 대신 그림을 수레에 실어서 여러 장 보냈는데 그냥 돈 받은 셈 치겠다고 하고 그림은 돌려보낸 이야기 등이 있다. 고흐를 치료했던 의사 펠릭스 레이는 고흐의 그림 딱 하나만 성의로 받고 다른 그림은 항상 거절했다고 한다. 동생 테오는 자신의 파리 아파트에 고흐의 그림 350점을 전시하는 회고전을 열었다.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친구였던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테오의 아내 요한나에게 테오가 세상을 떠난 지 한달 쯤 지난 시점에 고흐의 회고전을 한 번 더 열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지난 회고전으로 고흐의 이름이 알려졌고, 고갱이 당시 명성을 얻으면서 고갱과 같이 작업했던 고흐의 이름도 덩달아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없었던 요한나는 이 회고전을 거절했다. 베르나르는 1911년 자신이 고흐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책으로 출간하며 고흐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이 10년이다. 초창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로부터 계산하면 고흐가 대작을 그렸던 기간은 약 5년이다. 사람들에게 빨리 인정 받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 무명 기간을 거친 후에 인정 받는 화가도 적지 않다. 고흐 사후 1930년대에 전세계에서 사랑 받고 있던 것을 고려했을 때 고흐가 장수했더라면 말년에 명성을 누렸을 수도 있다. 물론 고흐의 정열적인 성격이 목숨을 빨리 앗아간 만큼 걸작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긴 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